이번 자연인의 집은 상당히 특이합니다. 마치 동화나 외국영화에서나 볼 법한 집인데요. 자연인 본인이 직접 짓다보니 시간도 많이 걸렸다네요. 한 10년 정도 걸렸답니다.








나무 조각들로 지붕을 덮고 나무기둥들 틈에 흑을 넣어 지었네요. 지붕은 흡사 울릉도의 전통집인 너와집을 연상케 합니다. 거센 비바람에 안전할런지 의문이네요.






내부는 넓고 높고 지하 창고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아마도 잠자는 방만 작게 온돌로 만들고 넓은 거실을 사용하는 형태인 것 같습니다. 괜찮은 것 같네요.







그러나 단점은 역시 나무와 흙으로 된 집이다보니 쥐가 자주 침범한다는 것. 지하의 쥐구멍을 틈틈이 흑으로 매꿔 주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흙과 함께 밤송이를 넣어서 쥐가 못 파도록 하는 것이 재밌네요. 흙을 파다가 밤송이에 찔리면 놀라서 도망갈려나요 ㅎㅎ


자연인 김형택 씨는 8살 때에 아버지가 전쟁통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이후에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6남매가 전쟁 후의 처참한 나라 상황에서 고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살아왔다는군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야간대학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고 이후에 해병대 장교로 복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기는 베트남전쟁이 벌어진 때.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포병 장교로 항공 관측을 하던 자연인은 폭격 소리와 비행기의 프로펠러 소리를 너무 많이 듣다 보니 이명이 오고 난청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군대를 나와야 했고 그래도 다행히 공부한 것이 도움이 되어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 되었지만 귀가 좋지 않다는 것은 그를 다시 직업을 그만두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교사로서 학생들의 이름을 외워야 하는데 이명과 난청이 생기면 기억력에도 문제가 생긴다는군요.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이가 힘들다고 느꼈을 때 다른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워 주어야 한다는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네요.


그때가 대략 45살 정도였고 산골살이를 결심하게 된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크게 말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자연 속에서 평화를 얻고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아주 만족한다고 하네요. 100을 기대했으나 90을 얻으면 10이 부족하지만 50을 기대했다가 60을 얻으면 10이 남는다는 자연인의 소탈한 철학은 얼마나 마음에 평화가 있는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의 산골요리를 보면 그가 얼마나 소탈한 사람인가를 잘 알 수 있는데요. 거의 채식주의자가 아닐까 싶더군요.






첫 식사는 부추,달래,튤립꽃잎,민들레를 넣어 고추장과 오가피효소를 넣어 만든 비빔밥입니다.









다음 식사는 직접 재배한 표고버섯을 넣이 지은 밥과 두릅, 둥글레를 밀가루 반죽을 해서 기름에 튀긴 튀김.







다음은 간식인데 산마늘,돌나물,머위꽃,다래순에 효소를 부어 먹는 자연인표 산골샐러드.





마지막 식사는 쌀,된장,밀가루,쑥을 넣고 끓인 자연인표 쑥죽인데 이 요리의 사연이 참 슬프네요.


한국전쟁 후 힘들게 살던 가족들 중 제일 막내가 그만 홍역에 걸리고 맙니다. 그 시기에는 홍역으로 사람이 많이 죽던 시기였나 봅니다. 더구나 먹을 것도 없어서 쑥을 뜯어다 쌀을 약간 넣고 쑥죽을 쑤어 먹었는데 거의 풀죽이라고 불릴 만큼 풀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헌데 그마저도 별로 없으니 병을 얻은 막내에게 먹이지도 못하고 결국 어머니의 품에서 죽고 말았다네요.





어머니는 "네가 죽어야 가족들이 편하다"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을 정도로 힘든 시기였던 것이죠. 결국 죽은 아이를 밤새 안고 울며 지새고 산속에 묻어 주었다고 하네요. 정말로 처참한 시대였군요. 자연인도 그러한 시기를 겪은 대한민국이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이 매우 뿌듯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자연인은 이 산에서 하고 싶은 것 하고 먹고 싶은 것 먹으니 풍요를 누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는 것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기 때문에 더 바랄 것이 없다네요. 작은 것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자연인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Posted by 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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